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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독일에서 온 선교소식 자료원 : 예장합동 김철호 조영남 선교사 발행일 : 94년 03월 31일

 

  • 사랑하는 독일 선교의 동역자님들께

    주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 순종하여 세계 선교의 비젼을 가지고 성도들을 주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권일현 목사님 김상중 목사님 김일남 목사님 유홍철 목사님 최호성 강도사님들 함께 순종하여 세계선교에 수고하시는 성도님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지난 독일의 겨울은 외국에서 선교하는 저희들에게도 너무 나도 지겨운 겨 울이었습니다.

    지난해 11월에서 부터 5개월간 검은 하늘과 비 음산한 추위 연속이었습니 다. 어린 바울이는 하늘색하면 회색을 가르킵니다. 이곳의 아침인사가 Guten Morgen! 다들 움추려 있다 조금 아침에 햇빛만 비쳐도 감격합니다. 이곳에 10여년 살았지만 한국의 장마철의 여러배나 힘 듭니다.

    이 날씨로 인하여 점점 독일인들은 가정으로 들어가 외부인에 대해서는 냉 정하며(혹 인격자는 친절도함) 항상 얼굴이 음산한 추위가 감도는 인상입니 다. 외부적으로 즐기는 문화가 발달되지 않았습니다. 의복도 추위를 막는 정도 음식도 쉽게 먹을 수 있는 구운 빵과 소세지로 아 침저녁 찬음식을 먹고 생활합니다. 그래서 검소한 나라입니다. 늘 비오는 저기압이므로 혈압이 낮아져 커피와 설탕이 많이 들어간 단빵과 돼지비개 맥주를 마시기에 비만증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음산한 날씨는 독일의 정신세계에 영향줍니다. 비오고 음산한 추위속에 서 가정으로 들어가서 관념 세계로 들어가 특이한 사상가들이 있게 되 다것 으로 생각됩니다. 괴테와 쉴러 칸트와 헤겔 막스와 엥겔스 쇼펜하우어와 니치체 아인슈타인 바하와 베토오벤등등의 예술가나 부정적인 철학자들이 나오고 생각을 많이 하다보니 철저한 합리주의가 발달하여 모든 법이나 질서가 빈틈이 없어서 한국의 인정과 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과 다른 주 예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 날씨와 경제적인 부요는 외국여행으로 몰아붙입니다. 독일인들의 바람 은 돈 벌어서 좋은데 가서 휴가를 즐기며 특히 무더운 해변이 있는 이태리 스페인 터어키로 가는 것입니다. 휴가 문화와 기독교절기 공휴일(년8일) 로 인하여 오히려 부활절과 오순절에는 교회가 비게되는 경향입니다.

    이곳 날씨는 겨울의 강추위나 여름의 부더위가 없어서 피부들이 약하여서 피부병들이나 알레르기 감기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기후로 인하여 독일의 봄은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잠시 5월에서 7 월까지의 밝은 날은 맞이합니다. 지금은 봄이 오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낍니다.

    독일의 선교전략을 위해서 독일의 국토와 독일 역사를 개요하여 보고드립 니다. (Deutschland von der Reichsgrundung bis Heute (Unipart-Verlag Stuttgang) 참조합니다.

     

    [ 독일의 국토 ]

    1937년 독일 제국의 경계선으로 본 독일 면적은 47만여 평방 킬로미터로 소련을 제외한 유럽의 1/10에 해당하는 국토를 가진 때가 있었다. 그러나 2차 대전후 폴란드에 병합된 슐레지엔 지역과 동프러시아 지역을 제외한 현재의 국경선 오더.나이쎄 강을 경계로 보면 독일의 연방 공화국 (서독)이 24만8천4백69평방키로미터이고 동독이 10만8천1백73평방 키로미터 로 동서독을 모두 합친 면적은 35만6천6백평방키로미터입니다.

    북쪽으로는 북해와 발트해로부터 남으로는 알프스까지, 서쪽으로는 라인지 역으로부터 동쪽으로는 호수와 늪이 많은 동프러시아와 슐레지아 산지에 이 르기까지 크게 5개지역으로 구분된다. 1) 북부 독일 저지대 2) 중부 독일 고원지대 3) 서,남부독일의 단층 및 산간지대. 4) 남부독일의 알프스 인접지대 5) 바이에른 주의 알프스 산간지대 독일의 우리나라와 반대로 북쪽은 평원지대이고 남쪽은 갈수록 산악, 고원 지대를 형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천 라인강과 베저 엘베강이 모두 북쪽으로 흘러서 북해로 향하고 동독의 오더강도 북쪽의 발트해로 흐르며 오직 도나우강 만은 남독 에서 발원해서 동남쪽으로 흘러 오스터리아와 동구권 여러나라를 지나 지중 해로 흐른다.

    북독 저지대에 속하는 주는 슐레스빅-홀스타인주와 함부르크, 브레멘, 니 더삭센의 대부분 지역과 노오드라인-베스트팔레주의 일부 지역이다. 위에 열거한 마지막 2주의 나머지 부분과 라인란드 팔츠,샤란드,헤센주는 중보 독일 고원지대에 속하고 일부분은 서남독 단층 및 산간지방에 해당된 다. 나머지 바덴 뷔텐베르크와 바이에른주는 알프스 인접지역이다.

    옛 독일 제국의 수도였던 베르린은 동서독 중앙지점의 엘베강 동쪽 동독내 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4대 강국 협정하에 서 베를린과 동 베르린으 로 분할되어 있다. 또한 1945년 소련에 의해 점령된 동독은 서독의 동쪽과 마주 경계하고 잇 으며 동독의 남부지역만이 산악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동독의 동쪽에는 오더강과 나이쓰강이, 북쪽으로는 발트해가 남쪽엔 수데 이텐 산맥이 쌓여 있고 현재는 폴란드 관할하에 있는 구독일 제국의 동부지 역에 접해 있다. 현재 폴란드 관할지역이 된 곳은 동프로시아 남부지역과 폼머른, 브란덴 부르크, 슐레지아 동부 지역들이며 동푸로시아아 북단은 소련에 합병되어 버렸다.

    1) 북부 독일 저지대는 해발 200-300m 정도로 북해와 발트해 연안도서 지 역으로 호수가 많고 구릉의 불모지나 점토지가 대부분이고 북서쪽으로 갈수 록 황무지에 늪지대로 광활한 습지대를 이루고 있다. 2) 중부 독일의 고원지대는 참으로 다양하다. 이 지역에 속하는 곳으로 라 인강 주변의 편암질 산맥(Hunsruick, Eifel,Taunus, Westerwald, Sauerland)과 헤센 지방의 산지, 튜빙거 산림지대, 하르츠산지,작센 산지와 수데텐산지들이 이 지역에 속한다. 가장 높은 곳은 해발 1142m의 하르츠 지역과 리젠게르게의 슈네코페 (1603m) 등이 있다. 3) 서.남부 독일은 단층 및 산지대에 속하는 지역으로 라인강 상류의 저지 와 그 주변의 슈바르츠발트 산림지대, 오덴발트, 슈바벤,프랑켄 단층지대 등이 이곳에 속한다. 슈바르츠 발트지역의 최고 높은 지역은 해발 1495m가 되는 곳도 있다. 4) 알프스 인접 지역은 슈바벤,바이에른 고원지대로 완경사의 언덕을 이루 며 평균 해발 500m 정도이다. 5) 알프스 지역은 해발 2,000m 이상이고 독일 알프스 최고봉인 쭈크슈피체 는 거의 3,000m나 된다.

     

    [ 독일의 역사 ]

    기원전부터 북부 독일의 지역과 스칸다나비아 반도 일대, 지금의 서남부 소련 지방에 정착하여 살던 고대 게르만 민족인 프랑켄족과 삭센족, 동부 고텐족들은 북해도 일대의 악천후 기후와 빈한한 고향땅을 버리고 약 2-3개 세기 동안이나 정처없는 유목민이 되어 남쪽 지방으로 차츰 이동해 왔다고 고대로마 제국의 역사학자 탁치투스(Tacitus AD 55-115년) 는 자신의 저서 에 기록했다.

     

    [게르만 민족의 대 이동 ]

    이러한 그의 기록은 당시 로마 군대의 침공을 막기 위해 라인강과 도나우 강변 곳곳마다 쌓았던 성벽과 성곽(Limes:AD100년경 축조된 것으로 추정됨) 들의 흔적으로 그 역사적인 신빙성이 입증된다.

    그는 게르만 민족을 가리켜 유럽 남부 지방에 살고 있던 사람들과 같이 푸 른 눈에 붉은 색 머리카락을 가졌고, 몸은 건장하다고 표현했다. 보통 고대 유목민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고대 게르만 민족들도 한곳에 정 착하여 단일 사회를 형성하지 못하고 항상 절기와 기후의 변천에 따라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녔으며 이 집단들은 한사람의 왕이나 장군 밑에서 임시 움 막을 짓고 살았다. 또 집단 무리 강누데 가장 강한자가 전쟁이 나면 이들을 통솔하며 새로 달 이 뜨는 날이나 만월이 될 때마다 정기적으로 군중대회(Thing) 을 열어 집 단내의 벌칙자나 범죄자들을 다스리므로 유목민들의 질서를 세우는 한편 이 들은 독수리를 숭상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로는 고대 게르만 민족들은 거의 2-4세기 이상까지 유목민 생활을 계 혹한다. 기원전 58년에 로마의 요새와 같던 퀼른 지방이 프랑켄족의 손에 넘어가기 까지 라인강변 일대는 근 5세기동안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남부독일 지방에는 정치, 경제, 문화의 기본적인 역사 전개에 대단한 영향을 미치게 하였고, 오늘날에도 서독 서남부 지방에서느 니 로마 색채가 매우 짙게 남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 프랑켄 제국의 성립

    한편 아시아지방에서 중국을 점령한 후 그 여세를 몰아 유럽지방까지 원정 온 몽고 훈(Hunn)족들은 AD 375년 경에 게르만 민족의 일부인 동부고텐 (Ost-goten) 조과 발칸족을 제일 먼저 섬멸시킨 다음 계속 각 지역에서 게 르만족을 괴롭혔다. 훈제국에게 패한 동부 고텐족들은 이때 쫓겨서 지금의 유고지방에서부터 이태리 지방을 거쳐서 멀리 스페인까지 이동했다. 그러나 약 70년이 지난 AD 451-455까지 훈제국과 약 5년간을 끄는 전쟁 끝 에 프랑켄족이 득세하므로 이 부족은 처음으로 게르만 민족의 강력한 지도 적 위치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이 부족은 [자유]또는 [용감한 종족] 이란 칭호를 받던 서부 게르만족을 하나로 로마제국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고 지금의 쾰른 지방인 리푸아리 아(Ru-puarier)일대에다 작은 국가를 세우고 지금의 헤센죽 일대를 국토로 삼고 있었다. 프강켄족으로부터 패한 로마제국이 독일 땅에서 세력을 완전히 잃은 때는 약 476년경이었다. 로마 군대가 철수하자 그들이 차지했던 영토들에 대해 당시 큰 부족들인 서부고텐족이나 부르군트(Burgunder)족, 동부고텐족들은 이땅을 서로 차지 하려는 다톰 때문에 오히려 그 세력이 차츰 약화되었다.

    특히 동부 고텐족의 테오더리히(Theoderich)가 게르만 종족을 하나로 묶 으려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는데 라인과 갈리엔 지방을 먼저 통합시킨 클 로드빅(Chlodwig) I세는 로마 교회를 흡수하는 한편 498년에는 스스로 왕위 에 올랐다. 그르나 이 메로빙거(Merowinger)왕조는 이때로부터 약 2백 여년이 지나도 록 게르만 민족을 하나로 통일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와같은 직접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는 독일 각 지방의 성주들을 대신하여 로마 교황청은 쾰른, 마인츠, 트리어의 대주교들을 일방적으로 선제후로 임 명하는 한편 당시 소국들의 국왕을 뽑는 선거에도 직접 간섭하므로 봉건 왕 국 정치사에 상당한 압력과 영향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랑켄족을 이끌고 있던 장군 칼 마르텔(Karl Martell)은 국력을 키운 732-737년까지 사이에 오늘의 아랍지방에서 부터 서부 고텐족이 왕국 을 이루고 있었던 스페인까지 통합하고, 또 남쪽으로는 부르군트 왕조도 흡 수시키는 등 종전의 고대 로마제국보다 더 넓은 영토를 확장하는 놀라운 지 략을 보였다. 이때 칼이 아들 핍핀(Pippn)이 로마 교황인 짜카리아스(Zacharias)로부터 황제 칭호와 국왕의 상징을 사용할 수 있도록 윤허를 받아내는 데 성공, 황 제로 등극하므로 명실상부한 통일제국을 건국할 수 있다.

    통치 중심지를 오늘날의 아헨(Aachen)지방에 두었던 프랑켄의 지배적 3대 종족 (Sachsen,Sailer,Hohenstaufen)은 종교세력과 세계적 정치세력을 같이 통합함으로써 평화와 권리를 보장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황과 황제간의 맹약은 오래 가질 못했다. 814년 칼대제가 운명한 후 두 아들 루드빅(Ludwig) I세와 로타르(Lothar) 가에는 상속문제에 따른 견해 차이로 서로 갈라지면서 일으킨 전쟁은 통일 프랑켄제국의 분리를 다시 잉태시켰다.

    이때부터 시작한 전쟁은 843년에는 로타르가 이끄는 로타링왕국(로마에서 아헨까지, 또 옛 프랑켄족의 영지모젤강 일대와 부르군트 지방)과 루드빅II 세가 이끌던 서프랑켄(지금의 프랑스 일대)으로 영토가 분리되는 결과르리 안겨주었다. 이와같은 국토 분리는 후일 독일 계통의 독립 투쟁과 점고대는 귀족들의 통치욕망으로 더욱 세분회되는 난립지대를 가져다 주었고, 또 로마 교회와 의 끈질긴 권력투쟁으로 인한 황제의 중앙 집권적 통치와 패퇴는 범 세계적 인 제국의 포기를 초래했다.

     

    * 국왕 선교제도와 도시문화

    프랑켄 제국이 여러 백작들로 하여금 공작령을 세우도록 윤허한 때는 약 900년 경이후였다. 이때 모두 6개의 공국으로 세력분할이 된 곳은 삭센공국을 위해서 튀링켄 (Thuringen) 바이에른(Bayern),로트링겐(Lothringen),슈바벤(Schwaben),그 리고 프랑켄(Franken) 국이었으며, 삭센(Sachsen)공국을 다스리던 하인리히 I세는 곧이어서 왕으로 칙봉되어 삭센족에서는 처음으로 왕이 되었다.

    한편 카톨릭을 신봉해 온 유럽 각지의 기독교도들이 성지 예루살렘을 마흐 메트(Mahomet) 회교도들의 손으로부터 탈환하려고 일으킨 십자군 전쟁은 로 마 교화 우어반(Urban) II세의 지시로 1095년에 첫 출정이 있은 다음 약 2 백년간을 이끌었다.

    이때의 십자군 원정(Kreuzzuge)에 자원했던 여러 나라는 수많은 사상자를 속출시키는 한편 유럽 정치사에도 중요한 전환기를 가져다 주었다. 모두 일곱 차례의 원정으로 이어진 이 전쟁에는 독일,프랑스, 이태리, 영 국 등이 이스라엘을 지원,모슬렘(Moslem)교와 투쟁했으나 종말은 예루살렘 의 패배로 끝났고 유럽 각국은 그만큼 큰 풍파를 안는 결과가 되었다. 이때의 참상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으나,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측면 을 유럽 여러나라에 안겨주었다.

    그것은 전쟁 이전까지 막강한 힘으로 황제나 왕들의 머리 위에 군림했던 교회와 교황 세력의 축소라는 정치적인 변화와 해외 원정을 통항 이방국가 간의 접촉으로 이스람 문화가 유럽지방에 전래되었고 또 중세시대에 정치 종교, 사회부분에 깊은 영향력을 남긴 기사제도가 꽃피워진 것이다.

    한편 슈타우펜 왕조가 하인리히 IV세에서부터 대가 끊어지자 이 왕가의 재 산을 상속하기 위한 국왕 선거제도가 처음으로 실시됐다. 이때 국왕을 선출할 수 있는 특수권한은 당시 7명의 실력자들 앞으로 돌아 갔다. 이 7명 가운데서 3명은 종교 지도자인 마인츠와 쾰른, 트리어의 주교겸 선 제후였고, 나머지 4명은 팔츠,삭센,브란덴 부르크의 백작들인데 이들보다 얼마정도 늦게 베멘(Bohmen) 백작도 참여했다.

    이들이 첫 회의자리에는 가진 것은 1257년으로 이때의 회의자리에는 공교 롭게도 외국인 백작(Richard von Cornwall과 Alfons X von Kastilien)이 참 여한 사건 때문에 이 제도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며, 국왕 선출은 무효가 돼 버렸다. 이처럼 국왕을 선출하지 못한 정치 공백기(Inter-regnum:1251-1273 까지)가 발생하자 독일은 정치적인 불안과 사회적인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후 국정을 재 정비하기 위한 제왕선거시에는 함스부르크의 루돌프 (Rodolf) I세가 선입되었고, 이 뒤를 이어서 룩셈부르크 왕가들이 득세했 다. 이후로는 국왕 선거는 함스부르크 왕가와 룩셈부르크 왕가 출신들 사이를 여러차례 오가는 변동기 속에서 룩셈부르크 왕가의 칼IV세는 프락(Prag)동, 서간을 연결하는 화해의 중심지로 결정했다. 한편 국왕이 선출되지 못한 사 이에 독일내의 수많은 대도시들은 자유 도시로서 경제, 문화적인 지배권으 리 확보하며 자치적인 발전을 꾀하기 시작했는데, 이들 자유시들은 지역적 인, 환경에 따라 북독의 한자동맹에 결속되거나 제국의 직속도시들은 따라 남독의 도시동맹을 결성, 점진적으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 다. 이때의 여러 자립 도시들은 인도주의 사상에 젖어들며, 외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새로운 문화를 심는 등 다른 사조에 대한 진취적인 개방 정책을 폄으로 후일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을 싹트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 도시들은 새로운 권리와 자유를 기초해서 올바른 제국으로 개력 하려던 농민 계급을 지지하는데는 매우 소홀했다. 1525년 끝난 농민 전쟁은 봉건 영주들의 결속을 도모케하는 결과를 낳았 고, 농민출신자 스스로는 더욱 비참한 대우를 받는 계급으로 전락(19세기까 지 정치 참여 불인정)하고 말았다.

     

    * 종교전쟁

    독일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이 해외로 진출하여 한창 식민지를 개척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을 때 마르틴 루터는 뷔텐 베르크에서 자기의 논재를 발표함 과 아울러 로마 교회의 개혁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시간이 감에 따라 독일 각지에서 논쟁이 벌어지면서 종교, 정 치, 경제 각 분야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이 무렵 스페인에서 자라난 함스부르크가의 칼 V세는 영주들에게 통고만 하고 독일의 지배자로 등장했 다. 이같은 사유로 루터의 종교 개혁운동은 각 지방의 영주들에게도 영향을 미 쳤고, 마침내 그들은 지방 분권적인 통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이 운 동에 가담했다.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약했던 칼V세는 서쪽에 프랑스, 동쪽에는 터키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로서는 새로운 타협점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 었으나 그 결과는 오히려 종교개혁 운동을 더욱 심화시켰을 뿐이었다. 결국 보헤미아 지방에서 시작된 신교귀족들의 봉기는 내란으로 번져 그후 독일은 30년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된체 외국 군대의 완전한 노리감이 되 고 말았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이 30년 전쟁으로 독일 인구는 5백만명의 희생자를 낸 후 베스트팔리아 화평이 맺어지게 되었다. 이때 맺어진 화평으로 독일제국은 여러 군주국가들의 동맹체가 되었고 이 들 군주국가들의 상호이해와 협력은 항구적으로 존속하는 제국회의 (Regensturg 에 소재를 둠) 을 통해서 조정되도록 했다. 처음 이 제국회의의 최고 관심사는 종교적 평화유지 문제와 제국의 중앙 집권적인 통제기능이었다. 이 무렵 대 터키진에서 승리를 거둔 오스트리아는 유럽에서 최대 강대국으 로 두각을 나타내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11개의 다른 민족이 통합된 다민족 국가로 성장했다.

    이와 때를 같이해서 강인한 프로테스탄트국으로 등장한 프로이센도 새로운 중심 세력을 형성하며 제국내에서 서로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전체 군국주의 제도는 독일안에 예술의 개화기를 안겨주었는데, 새로운 자 아의식이 싹튼 서민들은 개몽사상과 자유주의 신봉자가 되었다.

     

    * 자유주의 사상의 배태

    프로시아의 황제 요셉II세나 프로센의 프리드리히 II세와 같이 개혁을 천 명한 군주들은 일반 대중 서민층들로 하여금 정신적 예술적인 지도자를 찾 는 음직임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같은 해방무두는 독일과 프랑스혁명국과의 분쟁으로 모두 좌절되 고 말았다.

    나폴레옹에 승리한 독일 영주들은 빈(Wien) 에서 가진 화합에서 독일 내의 39개 군주국을 결속시키는 신성동맹(Hei-lige Allignz) 을 체결하므로 그들 의 채제를 다시 확립할 수 있었다. 이 이후 39개 군주국내에서는 일체의 민주주의적이고 자치적인 활동을 금 지시켰다. 그 반면에 독일 내 전국 어디서나 통관때마다 지불해야만 했던 통관세제를 없앤 것은 1816년으로 39개의 군주국은 일반 정치 분야 뿐만 아니라 경제분 야에까지 공존의지로 돌아서며 재 통일의 싹을 발아시켰다.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봉건제도에 시달려 온 국민들 가운데서 급진적 인 사상을 가진 일부 단체와 그 추종 인물들은 시대적인 변천기를 주도하려 는 노력을 꾸준히 모색하고 있었다.

    이같은 급진주의자들이 가장 좋은 기회로 삼은 것은 1848년 2월에 프랑스 급진파들이 주도한 혁명이었다. 이들은 루리스 필립(Louis Phippe)왕국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건국하는데 까지 성공하자, 이 조짐은 급기야 독일 각 군주국으로 크게 파급해 나갔다. 이같은 급진주의 운동은 항가리의 혁명(3월13일)으로 나타났고, 그 뒤를 이어서 빈 베를린, 이태리, 등지로 퍼져나갔다. 1848년 혁명운동을 통해서 국민적인 감정이 정치적인 성숙을 가져다주며 프랑크푸르시에서 열린 국민회의(10,31일)에서 민주주의 국민헌법까지 채택 하는 진일보를 했으나 외세가 전혀 끼이지 않은 조국 통일은 다질 수가 없 었다.

     

    * 제 2제국의 탄생

    1866년의 전쟁으로 오스트리아를 제국의 정치권내에서 탈퇴시킨 비스마르 크(Bismarck) 독일 각 지방의 군주들을 묶는 군주동맹을 형성하므로 그동안 민주주의자들이 열망해 왔던 소위 소독일(Nord deutscher Bund)을 탄생케 했다. 그후 1870년 프랑스의 선전포고는 독일 여러 제국들의 단결을 가져다 주며 프로이센의 빌헬름 I세를 독일 황제로 추대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 다. 이후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대륙의 선도적 공업국으로 급성장한 독일 제국을 동서간의 중재자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하므로써 각국간의 세력균형 을 유지시키려 했다. 이와같은 그의 노력은 일단 성공했으나 명예욕에 불탔던 빌헬름II세의 국 력 신장 정책 때문에 좌초되고 말았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 및 오스트리아간의 연방적인 통치 구조의 붕괴를 가져다 주었고, 대전이후 패전이라는 어려운 정치 상황속에서도 독일제국은 극심한 내부투쟁을 겪긴 했으나 그대로 통일을 유지함녀서 민주주의적 질서 를 다져왔다.

     

    * 봐이마르공화국과 히틀러 시대

    1차대전이 끝나던 해인 1918년 11월 9일을 기해서 빌헬름 2세가 발표한 황 제 하야성명과 오스트리아의 칼1세의 통치권 포기(11,11일) 항가리의 독립 선언 (10,11일)등 국내외 정세 변동은 독일에도 의회정치가 중심이 되느니 봐이마르공화국이 1919년 8월 11일자로 새로 출범할 수 있었다. 그러나 1차 대전으로 독일은 180만명의 전사자와 420만명의 부상자가 발 생, 국토는 황페하고 국민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또한 영토의 할양, 공장철거, 과도한 전쟁배상금 등 14개항에 달하는 종전 협정을 지켜야 하는 신생 봐이마르 공화국으로서는 막중한 정치적, 경제적 인 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화폐가치의 폭락과 인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에서는 예술의 개화기를 가져왔으며, 또 독일 과학사상 특기할 만한 발명도 많았다. 한편 경제적인 측면으로는 가내공업구조에서 기계 공업체제로 전활하던 시기인 1929-30년의 세계 경제공항은 패전국 독일에 매우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 발생한 집단적인 실업자 사태는 독재 정치가 다시 살아나는 온 상을 만들어 주었다. 1933년에 수상에 오른 아돌프 히틀러는 국가적 비상사태를 이용, 반년이 내에 독재적인 국가통수권을 모두 장악한 후 즉시 제국의회를 해산하고, 정 당활동을 금지시켰으며 이에 반발하는 지식인들과 당원들을 구속했다. 또 잇따라서 자신의 독재체제에 맞지 않는 모든 자앵물은 가차없이 제거하 였는데 그 첫 대상은 지식인 탄압과 유태인 처우문제였다.

    독일 민족의 통일과 독일어를 통용하는 이주지역을 독일 제3제국에 통합시 키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히틀러의 대담한 세력확장정책은 가혹한 인종차별 정책으로 표면화되었고 더불어 유럽 전 지역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몰아넣 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이 전쟁은 국력을 모두 쏟은만큼 철저한 파멸로 끝났으며, 또다시 독일민족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일대 혼란과 쓰라린 굴욕을 동시에 맛보아 야 했다. 이후 제3제국의 영토는 승전 연합국에 의해서 4개 지구로 크게 분 할하였고 옛 프로이센 제국은 오늘날의 세계 지도 속에서 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전후 복구 의지와 분단 통일

    종전 당시 독일 대도시들은 대부분 70-80%이상이나 완전히 파괴되었고 집 을 잃거나 동부 실지에서 추방된 실향민의 숫자느니 1천2백만을 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인들은 잿더미 속에서 다시 재건하는 놀라운 의지 를 보여 주었다. 마샬플랜 및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전후 경제회복 정책을 폈던독일은 이 미 1949년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직전의 경제수준까지 끌어 올 리는 놀라운 성장률을 보였다. 이를 바탕으로 국민의 안정과 사회복지를 위 한 각종 사회 보장제도가 입안되고, 부지런한 국민으로 세계적인 안목이 다 시집중되었는데, 1948-51년에 발발한 한국동란으로 독일 경제계는 세계시장 으로 향한 혹자 수준까지 급진전시키는 호기를 만나기도 했다.

    한편 1949년 5월부터 정치 활동이 해금된 후 자유선거를 통한 정부수립과 초대 수상 콘라드 아데나위를 맞은 서독정부는 정치적인 안정과 저 유명한 기적적인 경제부흥을 앞당기면서 세계속의 부국으로 다시 등장했다. 또한 유럽 공동 협력기구의 주선과 가입 복지제도의 확립, 독일 연방 군대 창설(1956년)등으로 오늘날에는 공산체제를 견제하는 중요한 역할까지 담당 하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Frankfurt) 교회소식 ]

    프랑크 푸르트 교회는 1994년도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주제로 하 여 그 실천방안으로 성경읽기와 기도생활 전도생할 등이 있습니다. 매월 각 기관 별로 헌신예배를 드리므로 사명을 더욱 고취 시키고 있습니다. 그동안 여전도회 헌신예배와 청년회헌신, 예배를 드렸습니다. 매 주일 예배를 드리 고 나면 친교하는 점심 식사를 전 교인이 함께 합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어 려운 학생들에게 즐거운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 대외적 계획

    지난 2월말 주에 유학생 수양회가 있었습니다. 독일 총회 파송 선교사와 김승연 목사를 중심하여 외국에 유학온 우리 한국 유학생들과 유럽의 교포 자녀들을 위한 수양회 입니다. 그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 대학생들이 외국생활의 어려움과 학 업에 어려움을 통하여 낮아진 심령이 되어 복음을 받아 드립니다. 그동안 주 예수를 멀리했던 유학생들이 이곳에 참석하여 주님을 위한 헌신자가 될 것을 결단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곳에서 어려서 부터 교포 2세로 자란 대학생들은 한국학생들과 교 제하는 기간이 되며 이곳에서 생활하는 자로서 평신도의 선교사의 사명을 가지는 좋은 수양회입니다. 프랑크 푸르트에서는 유학생도 참석하여 사명을 가지는 기회가 되었습니 다. 이번에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수양회를 가졌고 내년에는 프랑크 푸 르트에서 유럽 유학생 수양회가 개최될 것입니다.

    * 프랑크 푸르트 합창단 창단에 장소를 제공하겠다는 곳에서 변경이와서 장소를 찾고 있습니다.

     

    * 독일교회와 협력

    독일교회와 협력하고자 하는 것은 이곳에 온 외국인들을 함께 선교하느니 것입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정치적인 망명으로 인하여 노동고용으로 인하여 이곳에 머물러 있는 외국인이 500만 있습니다. 독일인 15명에 한명 씩입니 다. 독일은 이민국이 아니므로 언제인가는 자기들의 고국으로 돌아가게 됩 니다. 우리가 선교지로 찾아 갔을 때보다 이들은 마음이 낮아져서 훨씬 복 음을 받는 율이 높습니다. 우리 마을에는 터어키인이 3천명이 살고 있습니 다. 독일교회와 함께 이들을 주께로 인도하기를 독일교회는 먼저하고 있고 저희도 함께 동역하기르리 기도하고 있습니다. 모슬렘 신자들을 주 예수복 음으로 변화시켜 복음화를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 바랍니다.

     

    [ WORMS 보름스 교회 ]

    보름스 교회는 1994년도를 성령님 따라 살자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1월은 소망달 2월은 믿음달 3월은 기도달 4월은 전도달로 하여 집중적으로 양육하 고 있습니다.

     

     

    * 대외적 행사

    그동안 이곳 한국 어린이들과 국제결혼한 한국 자녀들을 위해서 있었던 한 국학교가 어린이의 부족으로 문을 닫았습니다. 합창을 통한 복음전파와 유대관계를 위한 합창단은 더욱더 열기를 더하고 있습니다.

    저희 독일 선교지를 후원하시는 성도님들과 목사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늘 저희의 필요를 채우시는 주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주후 1994년 3월 31일 독일 FRANKFURT 에서 여러분의 선교사 김철호 조영남 아름 다윗 바울 올림

 

 

출처 : http://kccmo.or.kr/

독일(Germ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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